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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유와 공동 식사

예수의 비유와 잃은 양 비유

누가복음은 원래 예수가 비판자들에게 죄인들과의 공동식사를 변호하는데 사용한 비유임을 인식하게 된 것은 아주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검토한 바와 같이 예수는 이 비유에서 되돌아오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정하다. 나는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맞게 행동한다고 말함으로 자기가 비난받고 있는 행동을 변호하고 있다.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주장하는 예수

 

한 쌍을 이루고 있는 두 비유, 즉 잃은 양 비유와 잃은 은돈 비유는 잃은 아들 비유와 아주 비슷하다. 두 비유는 각기 하나님의 감정 묘사를 피하기 위하여 하님의 이름을 돌려 쓴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므로 누가복은 비유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99명보다 회개한 죄인 한 명을 더 기뻐하실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와 같이 하나님은 히ㅗ개한 죄인 한명에 대해서 기뻐하실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비교점은 목자와 양떼 사이의 친밀한 관계도 꾸준히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단지 잃은 양의 찾음에 대한 기쁨이다.  되찾음은 무한의 기쁨을 낳는다. 목자가 되찾아온 어린 양에 대해 가난한 여인이 됯자은 은돈에 대해 기뻐하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기뻐할 것이다. 이 경우 누가복음의 비유는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에서 많은 의인들과 함께 가장 작은 자들 중에 하나, 즉 회개한 죄인에게도 무죄를 선포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그는 잃은 자들의 구원을 원한다. 그들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길 잃음은 그에게 아픔을 주었고, 이제 그는 그들의 돌아옴을 기뻐한다. 이것이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론적인 기쁨'이고 용서에 대한 기쁨이다. 기쁜 소식에 대한 예수의 변호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긍휼하시어 용서에 대한 기쁨은 그의 초고의 기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 빼앗겼던 자들을 그에게서 구해내고 잃은 자를 다시 데려오는 것이 구세주로서의 나의 직책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공포로 지배하던 상황에서 비유

 

이 비유는 공포가 지배하던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이것은 원래 불평하는 일꾼들같은 사람들에게 말해진 것으로서 비난에 찬 물음으로 끝을 맺었다. 하나님은 실업자들과 그 가족들을 동정하는 저 집주인과 같이 행동한다. 지금 그는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그는 전혀 자격이 없는 죄인들과 세리들도 그의 구원에 참여케 한다. 그는 마지막 날에 이와 같이 그들에게 행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하시므로 나도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명령으로 그 대신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불평하려는가? 이것은 다만 복음에 대한 변호일 뿐이다. 예수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 한가지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비유들의 수는 아직 많다. 바리새인들과 세리의 비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시니을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을 심히 경멸하는 몇몇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에게 말해진 것이다. 이 빙가 이들에게 말해졌다는 판단은 비유의 내용에 의해 옳은 것으로 입증된다.

 

예수의 비유는 분명히 이것을 처음 들은 당시 사람들에겐 지극히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탈무드에서는 기원후 1세기의 산물로서 이 바리새인의 기도와 극히 유사한 기도가 전해지고 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길 모퉁이에 앚아 있는 자드르이 무리에 참여케 하지 않으시고 회당에 앉아 있는 자들의 무리에 참여케 하신 것을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지마나 나는 일찍부터 율법의 말씀에 종사하고 저들은 일찍부터 헛된 일에 종사함이니이다. 나도 수고하는 저들도 수고하지만 나는 수고하고 그 보수를 받되 저들은 수고하고도 보수를 받지 못함이니이다. 나도 달려가고 저들도 달려가지만 나는 미래세계의 생명을 향해 달려가고 저들은 멸망의 구렁을 향해 달려감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