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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기쁜 소식을 변호하는 방법

예수의 비유들에는 반대자들을 어드려는 의도가 있다. 예수는 비판자들에 대해 기쁜 소식을 어떻게 변호해는지 살펴보자면, 세 가지 방법으로 진행했다. 아래에서 3가지 분류를 통해 자신의 기쁜 소식을 변호했음을 살펴볼 것이다.

 

예수의비유

 

예수가 기쁜 소식을 변호한 3가지 방법

 

우선 예수는 일련의 비유에서 비판자들의 눈을, 그가 기쁜 소식을 선포한 가난한 자들에게 향하도록 한다. 의사에 관한 구상말은 그들의 상황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가는 어떻게 내가 멸시받는 자들을 불러 나를 따르도록 할 수 있는지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은 그들에 관해 좀더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너희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또 다른 이유에서 죄인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건한 자들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다.

 

누가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석적인 고찰이 중요하다.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한 자리는 축제의 만찬이었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존경을 뜻한다. 왜냐하면 시몬이 예수를 예언자라고 그와 함께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이기 때문이다. 편력하는 교사들을 특히 그들이 회당에서 설교했을 때 안식일 만찬에 초대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추론하면, 아마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는 설교로 그곳 모든 사람들, 즉 주인과 손님들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그 여인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그 여인을 죄인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가 창녀이거나 아니면 불며예스런 직업을 가진 남자의 아내임을 표시한 것이다. 단지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무릎이나 발에 입맞추는 것은 생명의 은인에게 표시하는 것 같은 아주 겸허한 감사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얼마나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는가는 남자들 앞에서 머리를 푸는 것이 단점한 여인에게는 큰 수치인데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별 생각 없이 눈물을 닦기 위해 머리 수건을 벗고 머리를 푼 데서 알 수 있다. 그녀는 자기 눈물이 예수를 적시고, 자기가 주위 사람을 완전히 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놀랐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주 단순하게 큰 죄와 작은죄를 분류한다. 큰 감사와 작은 감사를 병행시키고 있다. 큰 죄를 아는 자만이, 자비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시몬아, 너는 이 여인이 죽을 죄를 범했지만 너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너는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크게 감사하는 마음이 너에게 없음을 의식하지 못하는가.

 

기쁜 소식을 비판하는 자들을 향한 메세지

 

이것을 말해주는 비유들에서는 복음의 변호가 극히 예리한 고발로 변한다. 너희는 아버지의 명령에 공손하게 '네;를 말했으나 끝내 순종을 거부한 아들과 같다. 너희는 해마다 지주에게 보내야할 땅의 소출을 보내지 않고 악행에 악행을 거듭한 소작인들과 같다. 너희느느 잔치에의 초대를 냉담하게 거절한 저명의 손님들과 같다. 나와 같이 식탁에 앉은 이 가련한 무리에게 멸시와 조소를 퍼부을 권리를 너희는 어디서 얻었는가?

 

아직 언급되지 않은 예수의 기쁜 소식

 

다른 모든 생각들을 무색케 하는 셋째 관점은 이 모든 것으로도 아직 언급되지 않았다. 예수는 멸십다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를 이 관점에서 변호하고 있다. 이 관점은 잃은 아들 비유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이 비유는 좀더 바르게 말하면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비유이다.

 

이 비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생활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비유는 아주 단순하게 서술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헤로우며 긍휼로 가득차고 사랑으로 넘친다. 그는 축하의 잔치를 베푼 아버지처럼 잃은 아들의 돌아옴을 기뻐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단지 이 비유의 내용을 말했을 뿐이다. 이 비유에는 두 개의 정점이 있다.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의 돌아옴뿐 아니라 큰 아들의 함의에 대해서도 서술하는데 두 부분 모두 거의 후렴처럼 같은 어귀로 끝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유가 두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첫 부분이 완전히 종결지어져 있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둘째 부분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둘째 부분을 부가문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이 부분은 알레고리화하거나 진술 내용을 변화시키지 않고 언어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완전히 이 설화의 틀 안에 속해 있다.